1.
내가 10살 때 쯤 종종 느꼈던 기분인데, 오랜만에 그 기분을 느낀다.
금요일에는 저녁 늦게까지 친구네 집에서 놀 때가 있었다.
저녁 9시가 되면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이 있었는데
친구와 나는 늘, 항상 헤어짐이 아쉬웠다.
그럴 땐 둘이 팔짱을 꼭 끼고 친구네 엄마와 우리 엄마에게 싹싹 빌곤했다.
"오늘 제발 같이 자게 해주세요. 내일은 숙제도 더 잘하고 심부름도 많이 할게!"
엄마들은 몇 번 근엄하게 안된다고 하신 이후엔 "그래 그럼"하며 못이기는 척 허락해주셨다.
둘이 나란히 누워 유승준, GOD, 좋아하는 남자애 얘기를 하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는 꼭 친구보다 먼저 잠에서 깨곤 했다.
아무래도 낯선 환경이라 그랬나본데,
혼자 잠이 깨 멀뚱멀뚱 그 집 천장을 바라보다, 곤히 잠든 친구 얼굴을 보다, 또 밖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 아줌마의 낯선 달그락거림을 듣다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어제 그렇게 머물고 싶었던 이 집이 못 견디게 벗어나고 싶어지고
엄마 얼굴이 생각나고 아빠 냄새가 생각나고
아무튼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구 불안해지면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몽롱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걸스카웃에서 여행을 가거나 하면 꼭 일찍 눈을 뜬 뒤 몽글몽글 한 가슴을 다독였었다.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처음을 함께 한 여행이었다.
아버님이 내년을 기약하는 축사를 하며 건배를 할 때나
낯선 집단에게서 느끼는 괴리감을 느낄 때
또 가슴이 몽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이없게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기보다는
내 가족이 내가 있으리라 여기는 곳으로, 그러니까 익숙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슴 몽글거림'은 일종의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듯하다.
어릴적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의 잔소리와 산더미 같은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 다시 혼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써야 할 자소서와 권태가 기다리고 있을테다.
하지만 당장의 낯섦과 불편함에 대한 저항심이 이 몽글거림을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싶은데.
엄마 아빠께 죄송하다.
도둑 여행의 설렘과 불안함에 취해 새해 인사를 제대로 못드렸다.
화가 많이 나셨다.
그 와중에 나는 다른 가족과 건배를 외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몽글거림을 너머 배신자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뭔가 답답하고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좀 즐기는게 뭐가 문젠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중에 남편이랑 결혼을 해서도
일요일 아침 이런 몽글거림을 느낄까?
그 때 내가 그리워하게 될 시공간은 무얼까.
여전히 초등학교 때 엄마아빠의 집으로 도망치고 싶을까, 아니면 혼자 살던 그 좁은 원룸이 그리워질까.
내 남편도 몽글거리는 마음을 눌러담고 나와 말없이 아침 식사를 하게 될까?
2.
오빠네 가족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를 많이 반성하게 된다.
엄마의 말대로 나는 '싸가지 없는 년'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의 분위기인지 나의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 개개인이 알아서 하기를 원한다.
옆 도시에 가서 렌트카를 빌린다든지 오늘 하루 뭘 하고 싶은지 정한다든지 하는 시시콜콜한 여행의 일과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는 나만큼 영어가 익숙하지 않고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머리 회전이 빠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어떤 것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실테다.
나는 그걸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왜 모를까. 왜 알아서 찾아보지 못하지.
너무 뻔한 말이지만 부모님께 짜증내기 전에
자신이 어렸을 적 어떻게 한글을 배웠는지 기억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엄마 아빠는 아무리 못해도 가나다만 백만번을 읽어주셨을텐데.
방금 언니는 카톡으로 해변가에 앉아계시는 사진을 보내는 어머니 아버지가 처량해보인다며
잠깐 자기가 그 쪽에 다녀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 전에
왜 그냥 두 분이서 그 자리를 온전히 즐기시지 못할까,
왜 각자의 여행 일과를 다 카톡으로 보고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정말 엄마의 말대로
천하의 싸가지 없는 년이거나
세상 이기적인 년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빠한테 어떻게 하면 두 분이 좋아하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고대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해야지. 잘 해드려야지.
곧 돈을 벌기 시작하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감정 상할 일도 많을거고 많이 답답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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